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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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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천 전투는 1950년 9월 한국 전쟁 중 영천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영천은 대구와 경주의 중간 지점으로, 중앙선과 대구선의 분기점이며, 이 지역을 점령하면 제1군단과 제2군단의 후방을 차단할 수 있어 전략적 요충지였다. 대한민국 국군 제8사단이 영천 방어를 담당했으며,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이 공격을 개시했다. 9월 6일 조선인민군이 영천을 점령했으나,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으로 9월 7일부터 13일까지 이어진 전투 끝에 제15사단은 섬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대한민국 국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낙동강 방어선 유지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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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영천 전투
관련 전쟁6.25 전쟁
시기1950년 9월 5일~1950년 9월 12일
장소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천
결과대한민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대한민국
교전국 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지휘관 1유재흥
지휘관 2김무정
추가 정보
전투 이름 (일본어)永川の戦い
시기 (일본어)1950년 9월 2일 - 13일
장소 (일본어)大韓民国경상북도영천시
관련 전쟁 (일본어)조선 전쟁
전투 결과 (일본어)국련군의 승리
교전 세력 (일본어)
교전국 1국련군
지휘관 (일본어)
지휘관 1류재흥 준장
지휘관 2무정 중장
병력 규모 (일본어)
병력 115,000명
병력 2추정 12,000명

2. 배경

영천은 대구와 경주의 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중앙선과 대구선의 분기점으로 8월 말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1] 영천을 점령하고 동쪽으로 향하면 대한민국 육군 제1군단, 서쪽으로 향하면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의 후방을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 이 전선 정면은 제1군단 좌익의 제8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제8사단은 정면 18km의 전선에 제21연대, 제3연대 제1대대(대대장: 정진 소령), 제16연대, 제5연대를 배치하여 방어했다. 예하 제10연대는 포항 정면으로 전용되었다.

2. 1. 전략적 중요성

영천은 대구와 경주 중간에 위치하며, 중앙선과 대구선 분기점이다.[1] 영천 점령 후 동쪽으로 가면 대한민국 육군 제1군단, 서쪽으로 가면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 후방을 차단할 수 있었기에, 8월 말부터 영천이 중요하게 여겨졌다.[1]

3. 양측 부대 편성

영천 전투 당시 양측 부대 편성은 다음과 같았다.[2]

'''유엔군 및 대한민국 국군'''


제10, 16, 21연대

  • * 배속 부대
  • ** 제11, 19연대, 제26연대 3대대, 제18연대 2대대
  • * 공군 정찰
  • ** 비행 부대 장: 오점석 대위


'''조선인민군'''

무정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다음과 같은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2]

지휘관부대
박성철 소장 (9월 5일부터 조렬광 소장)제15사단
김치구 대좌제48연대
리철영 총좌제49연대
리을설 총좌제50연대
리련섭 대좌포병연대
리주용 중좌제73독립연대
리종만 대좌제103연대


3. 1. 유엔군 및 대한민국 국군


제10연대 연대장: 고근홍 중령 (9월 8일 원대 복귀)
제16연대 연대장: 유의준 중령
제21연대 연대장: 김용배 대령

  • ** 제7사단 사단장: 신상철 대령

제3연대 제1대대 대대장: 정진 소령
제5연대 연대장: 최창언 대령
제8연대 연대장: 박승일 중령

  • * 배속 부대
  • ** 제11연대 연대장: 김동빈 대령
  • ** 제19연대 연대장: 김익렬 대령
  • ** 제26연대 제3대대 대대장: 신건선 대위
  • ** 제18연대 제2대대 대대장: 정승화 소령
  • * 공군 정찰
  • ** 비행 부대 장: 오점석 대위

3. 2. 조선인민군

무정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다음과 같은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2]

지휘관부대
박성철 소장 (9월 5일부터 조렬광 소장)제15사단
김치구 대좌제48연대
리철영 총좌제49연대
리을설 총좌제50연대
리련섭 대좌포병연대
리주용 중좌제73독립연대
리종만 대좌제103연대


4. 전투 경과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은 9월 2일부터 유학산에서 영천 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1] 9월 5일, 제15사단은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고, 한국군 제8사단은 항공 및 포병 지원을 받지 못해 중앙이 돌파되며 위기에 처했다.[1][2]

육군본부는 추가 부대를 제8사단에 배속시키고, 월턴 워커 중장에게 M46 패튼 전차 지원을 요청했다.[1][2] 9월 6일 새벽, 제15사단이 영천을 점령했지만, 곧 경주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제2군단 붕괴 위기는 모면했다. 이성가 제8사단장은 미군 전차 소대의 지원을 받아 인민군을 격퇴했다. 9월 7일부터 13일까지 한국군의 반격으로 제15사단은 섬멸되었다.

한국군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구분내용
사살3,999명
포로309명
파괴/노획전차 5량, 장갑차 2량, 트럭 85량, 각종 포 14문, 화기 2,327정


4. 1. 조선인민군의 공세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은 9월 2일부터 유학산에서 영천 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1]。 9월 4일, 무정 중장은 박성철 소장에게 "최인두 동지가 이끄는 제12사단은 안강리 선을 돌파하여 경주를 점령했는데, 박 동지의 사단은 왜 영천을 점령하지 못하는가?"라며 심하게 질책했다[1]

9월 5일 오전 1시, 제15사단은 3개 연대를 병렬로 배치하고 제73독립연대와 제103연대를 예비로 하여 각종 포 166문의 지원을 받으며 공세를 시작했다[1]。 이날은 비가 많이 내려 제8사단은 항공 지원을 받지 못했고, 혼전 상태가 되어 포병 지원도 불가능했다[2]。결국 제8사단의 중앙이 돌파되어 영천에 위기가 닥쳤다.

4. 2. 대한민국 국군의 대응과 반격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은 9월 2일부터 공격을 시작했지만, 9월 4일 사단장 박성철 소장은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1] 9월 5일, 제15사단은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고, 한국군 제8사단은 항공 및 포병 지원을 받지 못해 중앙이 돌파되며 위기에 처했다.[1]

이에 육군본부는 제18연대 제2대대를 제8사단에 배속시키고, 제8사단을 제2군단에 예속시켜 유재흥 군단장에게 사태 수습을 명령했다.[1] 유재흥 군단장은 제1사단 제11연대와 제6사단 제19연대를 제8사단에 추가 배속했다. 또한 월턴 워커 중장에게 M46 패튼 전차 5량으로 구성된 1개 소대 지원을 요청했다.[2]

9월 6일 새벽, 제15사단이 영천을 점령했지만, 경주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제2군단 붕괴 위기는 모면했다. 이성가 제8사단장은 제9공병대대에게 영천 탈환을 명령했고, 미군 전차 소대의 지원을 받아 인민군을 격퇴했다. 9월 7일부터 13일까지 한국군의 지속적인 반격으로 제15사단은 섬멸되었다. 한국군은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구분내용
사살3,999명
포로309명
파괴/노획전차 5량, 장갑차 2량, 트럭 85량, 각종 포 14문, 화기 2,327정


5. 전투 결과 및 영향

대한민국 국군은 영천 전투에서 승리하여 낙동강 방어선 유지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은 사살 3,999명, 포로 309명, 전차 5량, 장갑차 2량, 트럭 85량, 각종 포 14문, 화기 2,327정을 파괴하거나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은 9월 6일 이른 아침 영천을 점령하였으나, 경주 방면으로 남하하는 전략적 판단 오류를 범했다.[1] 이는 대한민국 국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9월 7일부터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9월 13일까지 전투가 이어졌고, 제15사단은 섬멸되었다.[2] 영천 전투의 승리는 한미 연합 작전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참조

[1] 서적 指揮官の条件
[2] 간행물 6・25전쟁사 5 낙동강선 방어작전(6.25戦争史 5 洛東江線 防御作戦) http://chppm.chilgok[...] 大韓民国国防部軍史編纂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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